[대전인터넷신문=세종/권혁선 기자] 따뜻한 하루의 좋은 글 전해 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하고 평안한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짓밟혀도 꽃피우는 민들레
맛도 좋고 튼튼한 강원도 감자를 계량,
현재까지 이어지는 배추와 무의 품종개량,
우리 땅에 맞도록 개량된 쌀,
과일 품종의 정착과 대량생산기술개발,
씨앗의 생명력 강화 개량 등을 이끈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세계적인 식물학자 우장춘 박사입니다.
그는 조선말 무신이자 친일파 우범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살해당했고
그 결과로 가세가 기울자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보육원에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원죄를 짊어지고,
일본에서는 조선인, 조선에서는 민족반역자의 아들로
삶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천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신념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
도쿄 국제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되었습니다.
집안 형편과 출신 때문에 실력과 관계없이
실업 분야를 선택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광복 후 식량난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이 도움을 청하자
우장춘 박사는 남은 일생을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우장춘 박사는 죽는 날까지 어깨를 짓누르던
아버지의 그릇된 그림자를 어떻게든 지우고자
사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따라다녔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리고 긴장된 한일관계 속에 훈장 수여를 놓고
갑론을박하던 정부는 우장춘 박사가 사망하던 그해
병상에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병상에서 포장을 수여받은 우장춘 박사는
한참을 오열하면서 말했습니다.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뛰어난 인재를 잃고 싶지 않던 일본 정부는
우장춘 박사를 감옥에 가두려는 초강수도 두었지만
스스로 조선인 수용소로 들어가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가족을 위해 쓰라고
대한민국에서 준 돈까지도 우량종자를 사버리는 데
기꺼이 사용했습니다.
수많은 냉대 속에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길가에 핀 민들레처럼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밟혀도 밟혀도 끈질긴 자생력을 갖고
금빛 찬란한 꽃을 피우는 민들레.
마치 민들레처럼 살아간 우장춘 박사의 좌우명은
그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얼굴을 들어 태양을 보라.
그리하면 그림자는 뒤로 물러날 것이다.
- 지그 지글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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