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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칠백의총 추모 순의제향 거행 최대열 기자 2024-09-19 16:39:17

[대전인터넷신문=종합/최대열기자] 국가유산청 칠백의총관리소는 9월 23일 오후 3시 칠백의총(충남 금산군)에서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호국선열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를 거행한다.



올해로 제432주년을 맞는 칠백의총 순의제향 행사에는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을 비롯하여 칠백의사 후손, 불교계 인사 등 300여 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초헌관(칠백의총관리소장)의 분향(焚香) 및 초헌례(初獻禮), ▲축관(祝官)의 축문 낭독, ▲아헌관이 헌작하는 아헌례(亞獻禮), ▲종헌관이 헌작하는 종헌례(終獻禮), ▲대통령 헌화(獻花, 국가유산청장 대행)와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향행제(祭享行祭) 후에는 국가무형유산 전승자의 살풀이 공연과 참배가 이어진다. 또한, 부대행사로는 순의탑 앞 잔디광장에서 국가무형유산 전승자의 줄타기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다.


금산 칠백의총(錦山 七百義塚)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선생과 의승장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칠백여 명의 의병이 조국강토를 지키기 위해 만오천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그분들의 유해를 함께 모셔놓은 곳으로 민족의 빛나는 호국정신의 상징이자 그 숭고한 가치를 가슴에 새겨야 할 뜻깊은 유적으로, 1963년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선조 25년 4월, 1592)이 일어나자 조헌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8월 1일(음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18일에는 호남순찰사인 권율(權慄)장군이 이끄는 관군(官軍)과 함께 금산의 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했지만 권율장군은 왜적의 기세로 보아 아군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열세임을 탐지하고 작전을 바꾸어 기일을 늦추자는 편지를 조헌선생에게 띄웠으나 미처 받아보지 못한 채 출병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금산 연곤평가절상 싸움에서 필사무퇴(必死無退)의 결전을 벌이다가 8월 18일(음력) 모두 순절했다.
 
조헌선생의 제자 박정량(朴廷亮)과 전승업(全承業) 등은 싸움이 있은 4일 후 칠백의사의 유해(遺骸)를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했다. 그 후 선조(宣祖) 36년(1603)에「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를 세우고 인조(仁祖) 25년(1647)에는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칠백의사의 위패(位牌)를 모셨다. 현종(顯宗) 4년(1663)에는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 사액(賜額)하고 토지(土地)를 내려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왔다.
 
종용사에는 칠백의사 이외에 눈벌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선생과 그 막좌(幕佐) 및 사졸(士卒), 그리고 횡당촌( ) 싸움에서 순절한 변응정(邊應井)선생과 무명의사(無名義士) 등 2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가에서는 매년 9월 23일(임진년 음력 8월 18일 해당)에 칠백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일본인들이 의총과 종용사를 훼손하고, 순의비를 폭파한 후칠백의총의 토지를 강제로 팔아 경역(境域)을 황폐(荒廢)하게 만들어 항일유적(抗日遺蹟)을 말살했지만 광복 후 1952년에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다시 지었으며, 1963년 1월 국가에서는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1963년 5월)에 따라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제1, 2차 보수정화 사업을 통해 오늘과 같은 성역으로의 면모를 갖추고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護國精神)을 이어받게 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과거 혼신을 다해 나라를 지켰던 칠백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후대에도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적극행정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라고 밝혔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최대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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